작년 가을 쯤, 회사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버스에서 정신이 아득해 쓰러질 뻔 한 적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허망감과 절망감이 몰려왔고, 하루하루를 꿈없이 살아가는 것도, 버티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이 갑갑한 현실과 부정적인 생각에서 잠시동안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 이후로 달리기를 통해 일상 속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껴오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1k도 숨이 턱 밑으로 차올랐던 나였기에, 42.195k를 완주하리라 감히 상상치도 못했다.
춘마 목표는 장거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
하프 무경험자인 나에게 풀코스 완주는 단연코 무리였다. 뛸 수 있을 만큼만 최선을 다해 뛰고자 했고, 여의치 않다면 수거차를 타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아침 일찍 대회장에서 엄마를 만나 63토끼 아버님 어머님들께 진한 응원을 받고 H그룹 미기록보유자 그룹에 대기했다.
처음 15k까지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단풍이 완연한 의암호수를 뛰며 그림 한 폭 같은 경관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사진도 찍고 여유도 부리며 신나게 뛰느라 나도 모르게 5분 30초 대로 뛰고 있었다. 그래, 이대로만 끝났으면 좋았을 뻔 했다.
예상외로 하프까지는 할 만 했다. 그러나 25k 부터 발목과 종아리가 아파왔고 28k부터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이 안 움직이니 앞으로 나갈 수 없어 정말 고통스러웠다. 더 뛸 수 있는데 움직일 수 없으니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싶었다.
30k에 다다르자 이제부터 진짜 마라톤 시작되었음을 느겼다. 아, 이 것이 마라톤이구나! 이전에 해왔던 달리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달리기하는 폼만 잡아왔던 것이다.
걷고 뛰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조금이라도 더 뛰어보고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스트레칭, 숫자 100까지 세기, 바닥만 보고 달리기, 파워젤 먹기, 진통제 먹기, 바셀린과 맨소래담 바르기, 음악 듣기까지.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내가 여기 왜 있나' 생각으로 가득찼고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수거차를 기다릴까 싶었다.
마라톤 영웅 황영조도 고비였다던 35k부터는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뛰었는지도 기억에 나지 않는다.
"포기하지 마세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외친 그 한마디를 마음에 품고 달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라톤 동호회 분들, 자원봉사 친구들, 일반 시민 분들의 응원소리가 귓가에 들려왔고, 그 힘으로 버티며 한 발씩 나아갔다.
마지막 1k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무모한 도전이 현실이 될 생각을 하니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다.
정말 어쩌다보니 풀코스를 완주했다.
풀코스 우승자이신 엄마에게 메달을 보여드려, 그 딸 임을 드디어 인증하게 되어 행복했다. 수만킬로를 달려오신 마라토너 엄마를 둔 것이 자랑스러웠고, 튼튼한 두 다리와 건강한 정신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공식 기록은 4시간 59분 59초이다. 5시간에 꼭 맞춰 들어왔다.
2017년 가을의 전설, 춘천마라톤은 나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
한계를 스스로 넘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목표를 향해 나가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전을 현실로 만든 가슴벅찬 날이다.
내 두 발이 되어준 아식스 퓨젝스 러쉬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