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이 찡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 두터운 잠바를 벗어 던지고 슬리퍼와 반바지 차림으로 동남아시아의 작은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4개월이 지난 지금, 어느덧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코피 오 코송(Kopi-O-Kosong Ais)이란 단어에 제법 익숙해졌다.

현재 나는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 내 영자 신문인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에서 인포그래픽 팀에 신입 웹 개발자로 데이터 분석과 그래픽, 데이터 시각화 업무를 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어떻게 낯선 나라 싱가포르와 인연을 맺게 되어 오게 되었는지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싱가포르 취업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참고 링크를 정리했다.

'내' 일을 찾아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았다. 운 좋게 대학 졸업을 하기 전, 대기업의 교육재단에서 기획자로 입사해 온라인 교육 플랫폼 업무를 맡아 2년 간 근무했다. 사회 생활의 첫 시작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2년 간 직장에서 일 다운 일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다. 회사 내부 사정으로 매번 업무가 바뀌는 터라 전문성을 갈고 닦으며 일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누군가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내 일을 설명하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절망감이 몰려왔고 하루 종일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렸다. 어느 날에는 버스에서 어지럽고 눈 앞이 캄캄해지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식은 땀을 흘리며 쓰러질 뻔 했다. 병원을 가니 미주신경성 실신이라고 했다. 나는 이날 이후로 회사 그리고 일에 대한 마음을 모두 단념했다. 그리고 보란듯이 그 시간을 내 자신을 위해 쓰기로 했다. 보란듯이 업무 시간에 기술문서 번역도 하고 독학으로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웹 개발자라는 뱃지를 확득하기 까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해본 것 같다. CS관련 해외 온라인 강의도 여러 개 수강했고, 유명 부트캠프도 다녔고, 유다시티 나노디그리 수료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컴공과 출신이 아닌 내가 해외 무크 수료증을 100개 넘게 딴다고 한들 모두가 꿈꾸는 으리으리한 대기업에 입사할 수 없다고 했다. 어느 선배는 개발 실력도 중요하겠으나 능력과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학위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후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지만 연구하기 위해 내가 갖춘 능력과 지식은 미천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원 첫 학기 '데이터 시각화' 수업을 수강했다. 당시 나는 자바스크립트 기초를 마치고 리액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업에서는 데이터 시각화 이론과 더불어 d3.js를 가지고 막대 그래프, 꺾은 선 그래프 등 아주 기본적인 차트를 코딩하는 방법을 다뤘다. 개발 실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과제 요구 사항을 넘어서 좀더 난이도 높은 과제물을 제출했다. node.js로 데이터를 스크래핑하고, 리액트에서 svg와 d3.js를 사용해 데이터 시각화 차트를 구현했다. 그리고 매주 과제를 묶어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사이트로 배포했다. 수업을 통해 '데이터 시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연구 분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개발에 눈에 뜨게 된 것은 작년 여름 레일즈 걸스 서머 오브 코드(Rails Girls Summer of Code)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레일즈 걸스 서머 오브 코드는 전 세계 여성 개발자들을 선발해 유명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컨트리뷰터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글로벌 프로그램이다. 나는 Babel.js 프로젝트에 합류해 3개월 간 코어 메인테이너들과 국내 선배 개발자들의 도움을 받아 바벨 사이트 내 코드 에디터를 유지 보수하는 일을 했다. 3개월 내내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나보니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고 코딩 실력도 눈에 띄게 향상됐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해외 개발자들과 점점 가까워지니 나도 좁은 한반도를 넘어 넓은 세상에서 맘껏 꿈을 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라는 부정적인 메시지로 늘 가득찼다. 학위증도 없고, 아무런 경력도 없이 서른 살을 바라보고 있는 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모든 것을 체념한 그 때, 8월의 마지막 날. 나는 무작정 싱가포르로 여행을 떠났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싱가포르에서 나는 최대한 많은 현지 개발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6시간 30분 장시간 비행의 여독을 풀지도 못한 채 싱가포르에 오자마자 싱가포르 자바스크립트 커뮤니티 미트업 행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날에는 싱가포르 중고나라 서비스인 카로셀 오피스에서 약 50여명의 현지 개발자들이 모였고, Vue.js, 객체 지향 디자인, 실무 프로젝트 사례 등 주제 등 발표가 있었다.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난 깊은 지식과 통찰은 물론, 군더더기없는 매끄러운 스토리텔링에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단연코 일년 중 참석했던 개발 행사 중 으뜸이었다. 누가 개발자는 말 주변이 없다고 했을까. 기술자는 인문학적인 언어를 모른다는 나의 편견이 산산조각난 행사였다. 싱가포르는 C++ 코딩을 할 수 있는 총리를 둔 나라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발표는 어느 시니어(vue.js 마스터로 불리는 그는 지금 내 옆-옆 자리에 앉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의 인터렉티브 웹 게임 개발 사례였다. 그는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 내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 인터렉티브 팀에서 웹 개발을 하고 있다. 고전 게임인 '윌리를 찾아서'에서 영감을 받아 싱가포르 내셔널 데이를 기념하고자 'NDP Hunt'라는 게임을 만들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53가지 숨겨진 아이템을 찾는 게임으로 2주 간 2만 1천명이 넘는 사용자들이 접속하는 쾌거를 이뤘다고 한다. 그는 실제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제 해결 과정을 설명했다. 예컨데 게임 오브젝트를 만드는 방법, 알고리즘 최적화, 사용자 데이터 분석 등이다. 끝으로 그는 소속된 팀에서 주니어 시니어 웹 개발자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도 훌륭하고 기발했지만 프로젝트 방식과 업무의 흐름, 원활한 협업,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모든 것이 즉흥적이었다. 용기를 내어 발표자를 찾아가 내 자신을 소개하고 지금 여행 중이며 외국인도 지원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는 자신의 이메일 연락처를 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이력서와 직전학기에 만든 데이터 시각화 포트폴리오 링크를 별도로 첨부해 발송했다. 그리고 며칠 후, 팀 리더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에 구경오지 않을래?"

미팅 전 준비

취업은 연애와 무척 닮았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기에 소위 '스펙'을 통해 매력을 짐작한다. 예컨데 키, 외모, 신체사이즈, 학벌, 직업 등의 스펙은 상대방을 아는데 필요한 사전 정보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사전 정보는 메일 주소 뿐이였다. 하지만 링크드인을 통해 내가 지원하는 부서에 근무하는 개발자, 디자이너의 프로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개발자들의 깃허브에 들어가서 코드를 보기도 하고 외부 발표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링크드인으로 타 부서에 다니고 있는 주니어 개발자에게 회사 정보와 업무 환경 등을 물어봤다. 흡사 썸남을 뒷조사를 한 격이였다.

나는 링크드인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정식적인 채용절차를 밟지 않았다. 다시 회사 채용 공고를 찾아 읽으며 요구하는 기술 스택을 점검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스킬 셋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 / 할 수 없는 일 / 단 기간에 배우면 할 수 있는 일 / 단 기간에 배워도 할 수 없는 일으로 정리했다. 나는 프론트 웹 개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리액트와 d3.js로 데이터 시각화를 만들어 본 적이 있으므로 HTML&CSS&JS, react.js, d3.js 등은 jQuery, 바로 실무에 투입되어 할 수 있는 일로 분류했다. 개발팀은 vue.js를 사용하고 있으나, 나는 해본 적이 없었다. 일정 학습 기간 후에 vue.js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해 단 기간에 배우면 할 수 있는 일로 분류했다. 하지만 .NET, .PHP, Drupal는 해본 적이 없다. 이 스킬 셋은 단 기간에 배워도 할 수 없는 일로 분류했다. 이렇게 나름대로 점검을 해보니 객관적으로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고 팀에서 찾는 사람이 내가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궁국적으로 나는 채용 공고 중 모든 요구사항에 60% 정도 매칭됐다. (한창 자격 미달이라 조바심이 났지만 남성 개발자들은 채용 공고 중 60%만 충족해도 지원한다는 글을 읽었기에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지금도 심심할 때면 링크드인에 들어가 채용 공고를 읽어보며 잡 마켓 트렌드를 읽어보곤 한다. 채용 공고는 잡 마켓에서 각광 받는 기술이 무엇인지, 회사에서 어떤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미팅을 앞두고 팀에서 제작한 모든 데이터 시각화 프로젝트를 리뷰했다. 인터렉티브 그래픽스 팀에서는 데이터 시각화와 데이터 분석을 주로 하고 있고 그 외에 인터렉션, 게임, WebAR과 WebVR, 3D, 애니메이션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멋진 팀 포트폴리오를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고 나도 함께 일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력서보다 프로젝트

며칠 후 팀장과 회의실에서 단독 미팅을 가졌다. 팀장은 채용 절차를 거치기 전 업무와 핏이 맞는지 서로 확인차 만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회사 소개와 더불어 팀 업무 설명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가 제출한 데이터 시각화 프로젝트를 직접 하나씩 보시며 조언을 해주셨다. 기술적으로는 높지만 스토리텔링과 설득력이 부족하다며 독자들의 인사이트를 얻으려면 스토레텔링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발자들은 요구사항에 맞춰 단순한 코딩만 하지 않는다고 했다. 팀 내 모든 개발자들이 아이디어 기획 회의에 참여하며, 개발 80% 리서치 20%의 업무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디자이너도 코딩을 하고, 깃을 사용한다. 모두가 디자이너, 개발자, 기획자 인 셈이다. 그는 외부 개발 행사 및 컨퍼런스 등 발표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영어 글쓰기와 읽기를 좋아하는지도 물어봤다. 미팅이 끝나갈 때 쯤, 그는 채용 과정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당시 잘 몰랐지만 실제로 팀에 합류한 이후 여러 지원자들을 보니 개인 프로젝트와 포트폴리오는 그 어떤 학위증 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휘황찬란한 이력서보다 지원자가 참여한 프로젝트와 포트폴리오 링크 하나로 그 사람의 지식과 업무 능력이 모두 검증되는 셈이다. 얼마 전에는 팀 동료가 팀 내 개발자 모두가 내 깃허브 코드와 블로그 글들을 읽었다고 귀뜸해줬다. 팀장은 내 블로그 글을 번역기를 돌려 영어로 읽기도 했다고 한다.

미팅 후 이틀 뒤, 테스트 과제를 받았다. 샘플 데모 영상과 디자인 시안, 개발 명세서를 보고 차트 라이브러리 없이 인터렉티브한 반응형 시각화 차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여유로운 동남아 여행을 꿈꾸었지만 하루종일 숙소와 카페에 쳐박혀 코딩만 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간단한 라인 그래프였지만 쉽지 않았다. 리액트와 d3.js를 써본 기억은 희미해졌고, d3.js는 새 버전 v5이 나온 터라 다시 공부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냉방병에 걸렸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요구사항 중 툴팁(tooltip)은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소스 코드는 깃허브에 올리고 깃허브 페이지로 배포한 다음 링크만 전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귀국길에 올랐다.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가던 도중 반가운 이메일이 도착했다. 과제가 통과된 것이다. 회사로 와서 코딩 인터뷰를 올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싱가포르가 아닌 한국에 있었기에 화상 면접을 부탁했다.

영어의 중요성

나는 20대 전부를 한국에서만 보냈다. 부끄럽지만 남들 모두 다가는 어학연수, 외국생활, 유학 경험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토익 점수도 만료된지 오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넷플릭스나 유투브를 하도 많이 본 덕분에 영어를 읽고 듣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영어 말하기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지금도 유창하고 매끄러운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매일매일 전쟁을 치른다. 싱글리시 악센트에 익숙하지 않으니 몇 번이고 되물어보는 것이 일상이다. 면접을 코 앞에 앞두고 기술적인 질문을 영어로 대답해야 하니 엄청난 부담감이 몰려왔다. 우리나라 말로도 쉽지 않은데 영어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깨끗하게 마음을 비우는 것 뿐이였다.

회상 면접은 팀장과 시니어 개발자가 면접관으로 참여했다. 면접 질문은 생각보다 평이했다. 자바스크립트 어려운 개념이나 수수께끼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가 제출했던 코드를 기반으로 어떻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등 문제 해결 과정을 주로 물었다. 단순 코딩 테스트보다는 코드 리뷰를 받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인터뷰를 앞두고 내가 해결하지 못한 툴팁을 구현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인터뷰 때는 완성하지 못한 이유와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모든 요구 사항을 100% 만족한 것이 아니니 부정적인 피드백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오히려 시니어 개발자는 내 코드가 가독성이 높고 잘 정리 정돈된 느낌이라며 칭찬해줬다. 실제 현장에서 인터뷰를 봤더라면 직접 코드 리뷰를 해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10년 후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지, 팀에서 기대하는 바를 끝으로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인터뷰 과정에서 그 누구도 내가 나이가 몇 살이며, 전공은 무엇인지, 결혼을 했는지 등 개인사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나는 여러 후보 중 하나였고 기술적인 주제 이외에 다른 질문은 일절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해외 취업 시 개발자에게 높은 영어 실력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영어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코딩만큼 (어쩌면 더 대단한) 중요한 무기였다. 채용 과정을 통해 엔지니어에게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다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됐다. 영어는 마지막 관문에 다가갈수록 더더욱 중요해졌다.

일주일 후 기술 면접이 통과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HR 담당자는 회사 공식 이력서 및 자기소개 양식, 레퍼런스 체크, 희망 연봉, 예상 출근일 등이 적힌 문서를 보내줬다. 정말 다행인 것은 전 직장 동료가 영어 마스터였기에 레퍼런스 체크에 문제가 없었다. 전 직장 동료 중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HR 면접은 기술 면접보다 더 까다로웠다. HR 담당자는 많은 국가 중 굳이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왜 개발자가 되려고 하는지, 회사와 팀에 무엇을 기대하는 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등을 질문했다. 특히 개발자로 커리어 전환하는 이유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봤다. 공대가 아닌 음대를 졸업하고 기획자로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개발자로 커리어 전향을 하는 것이니 매우 특이한 사례다. 인터뷰 중 작곡과 개발 과정이 공통점이 많다고 답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곡(composition)은 음을 구성하는 것(compose)이고, 소프트웨어 개발 또한 여러 블럭들을 조합하는 것이니 그 과정이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임기응변이었지만 꽤 괜찮은 답변인 것 같다. 그러나 긴장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대부분의 인터뷰를 더듬거렸고 했던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영어를 더 잘 했더라면 좀 더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돈보다는 성장

우리나라는 평생 직장을 중시하는 반면 싱가포르는 잦은 이직을 통해 경력을 업그레이드 하며 몸값을 불려나가는 구조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와 달리 연봉이 아닌 월봉이 기준이며, 신입 초봉은 우리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다. 나의 경우 연봉 협상 경험이 적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더군다나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높은 국가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생활이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IT 업계 신입 개발자 급여의 최댓값을 적어냈다.

회사가 제안한 급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낮았다. 돈과 성장을 놓고 한창 저울질 하던 나에게 어느 시니어 개발자는 처음 해외 이직을 할 때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는 커리어를 전환을 희망하는 중고 신입이며, 비자 스폰이 절실한 입장에서 터무니없이 높은 연봉을 요구하는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돈보다는 성장을 우선시 하라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마지막 최종 오퍼를 받았을 때는 최초 제안 연봉의 최댓값에서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회사 내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이사, 항공 및 주거비 지원 등 지원 제도도 있어 만족스러웠다. 싱가포르에서 오고 나서야 업계에서 주니어로 꽤 괜찮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몇 주 후, 드디어 최종 오퍼 메일을 받고 취업 비자를 신청했다. 출근일을 정했지만 싱가포르로 이주하기까지의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휴학을 해야 했고, 새로운 세입자를 찾아야 했고, 그동안의 세간살이를 정리해야 했다. 그렇게 모두 정리하고 보니 이민 가방 2개가 나왔다. 29살 마지막을 앞두고 엄마와 작별 인사를 하고 고국을 떠났다.

다양성이 주는 즐거움

계획은 없었지만 싱가포르라는 국가, 그리고 지금의 회사와 팀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다. 일평생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에게 싱가포르는 풍요로운 다양성을 현장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다. 영어, 말레이, 타밀어, 중국어가 공존하는 환경에서 아시아-태평양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고 있다. 팀원들의 출신 국가, 종교, 문화가 다양하니 협업을 통해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을 배우게 된다. 뉴스룸에서는 아시아 각국 주요 이슈를 다루느라 분주하고, 디너 파티는 세계 각국 음식으로 만찬이 펼쳐진다. 끝까지 내가 한국을 고집했더라면 다양성이 주는 혜택과 즐거움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는 작은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를 세상에서 가장 심심하고 재미없는 나라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엔지니어에게는 아시아 국가 중 가장 활발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싱가포르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컨퍼런스, 미트업, 해커톤 등 다채로운 기술 행사가 열린다. 이번 주 토요일 만해도 10개가 넘는 기술 행사가 열렸다. 기술 커뮤니티 수만 해도 95개가 넘는다. 주말마다 기술 커뮤니티에 나가 현지 개발자들과 어울리면 지루할 틈도 없다. 이렇듯 다양한 기술, 사람, 문화, 언어가 어우러진 이 곳이 매일마다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 넣어준다.

인생의 나이테

아홉 수는 인생의 나이테 만드는 시기라고도 한다. 좁은 나이테는 여름이 메마르고 무더웠음을 말하고, 넓은 나이테는 강수량이 평소보다 더 많았음을 말해준다. 나무가 성장한 기록은 그 나무의 나이테에 나타난다. 가물었을 때, 질병이 들었을 때, 불이 났을 때,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을 때, 나무의 심층부에 박혀있게 된다고 한다.

나의 20대는 버티고 또 버티는 연습이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값비싼 수업료를 치웠다. 가슴 뛰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제서야 희미한 나이테 하나가 더 만들어진 모양이다. 앞으로도 문득 어제처럼 매서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그 때마다 지난 겨울을 기억하며 버티고 겹겹이 나이테를 그리며 천천히 살아가고자 한다. 겨우내 튼튼한 뿌리를 만들 수 있었고 그 뿌리의 힘을 바탕으로 비로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다시 봄이 올 때, 그동안 버텨줘서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내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아래는 개발자로 첫 출근을 자-축 하기 위해 로비에서 찍은 사진이다.

추천 사이트

  • MyCareersFuture.sg 싱가포르 노동청에서 운영하는 구직 공고 사이트다.
  • engineers.sg 싱가포르 내 기술 커뮤니티를 총 아카이빙 했다. 미트업, 컨퍼런스 등 모든 기술 발표 세션 동영상을 볼 수 있으며 일정도 확인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 오게 된다면 꼭 현지 미트업에 참석해보길 권장한다.
  • 월드잡 코리아 정부에서 우리나라 청년들의 해외취업 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월드잡플러스 에서 해외 잡 페어, 해외 취업 공고는 물론 무료 영문 이력서 첨삭, 해외 정착금 지원 사업 서비스를 제공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지원금 8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